▲ 곽미자 춘해보건대학교 요가과 교수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하는 세계 요가의 날이 코로나19로 인해 작년부터 행사가 있는 듯 없는 듯했다. 반갑게도 전라남도 구례에 위치한 천년고찰 화엄사가 ‘천년의 숨결과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세계 요가의 날 축제를 주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화엄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한 적이 있어서 각황전의 고풍스러움이 요가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 인터넷 기사를 보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 이유는 각황전 앞에서 찍은 홍보용 사진 몇 장 때문이다. 민소매에 배꼽을 드러낸 옷을 입고 요가자세를 취한 모습이 천년고찰이 품고 있는 자연과 조화롭지 않아 보여서이다. 물론 요가자세를 하다보면 헐렁한 옷보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는 것이 편안하다. 요가자세를 할 때마다 옷매무새를 고치지 않아도 되니 옷에 신경을 덜 쓰이게 돼 요가 경험에 몰입하게 한다. 또한 강사가 회원의 요가자세를 쉽게 관찰할 수 있으므로 가능하다면 요가복을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였던 점은 단순히 요가복 때문만은 아니다. 요가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정한 세계 요가의 날인데 그 의미를 깊이 못 보는듯 해 그러하다.

세계 요가의 날은 2014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제정해 선포한 날이다. 2015년부터 매년 6월21일 전후로 전 세계에서 세계 요가의 날 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인도 뉴델리에서 평화와 조화를 주제로 개최된 제1회 세계 요가의 날 행사에서는 인도 모디 총리를 비롯해 3만5000여 명이 한곳에서 단체적으로 요가자세를 선보이기도 했다. 필자도 운 좋게 인도정부 관광청의 초대로 2017년 인도 럭나우에서 열린 세계 요가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아쉽게도 요란한 폭우를 피할 곳이 없어 요가매트를 머리 위로 쓰는 별난 행사가 되어버렸지만 모디 총리의 요가 사랑은 확실히 느껴졌다.

2014년 UN총회의 기조연설에서 모디 총리는 요가가 기후변화 대처에 도움이 될 뿐 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 정신과 육체, 절제와 충족의 통합을 통해 인간과 세계, 자연의 하나됨을 깨닫게 해준다고 피력했다.

요가는 산스크리트어로 합일, 통합, 하나됨을 뜻한다. 모디 총리의 기조연설에서 요가가 지향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달되었지만, 매년 세계 요가의 날 행사에서는 그야말로 보여주기 식의 신체 중심의 퍼포먼스가 주를 이룬다. 핵심은 가려진 체 겉으로 드러난 겉모습만 보고 그것을 요가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언젠가 TV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서 ‘고난이도의 요가를 하는 아이돌’이라는 글을 보게 됐다. 자막을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요가’ 대신에 ‘요가자세’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예전에 비해 요가에 대한 이해 수준도 높아졌지만, 대중은 여전히 요가를 그저 요가 매트 위의 신체 움직임 정도로 알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유연할수록 난이도가 있는 것으로 여기며 요가를 잘 한다고 속단하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요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이다. 요가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요가인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몸을 더 혹사시켜서라도 남들이 할 수 없는 자세를 경쟁적으로 하려고 한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요가도 요가자세도 아니다. 어떤 움직임이 요가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무리를 가하는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몸의 움직임을 통해 몸과 마음의 경험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요가를 할수록 비폭력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요가를 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가자세를 할 때는 몸의 움직임과 호흡의 일치, 신체의 감각을 자각하는 것이다. 몸이 유연해 상상을 초월하는 자세를 하더라도 ‘알아차림’ 없이 습관적으로 한다면, 요가수련 후 마음의 평화로움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요가와 거리가 멀다. 자신의 몸에서 시작하는 요가일지라도 요가의 본질인 ‘알아차림’이 확장되면, 요가는 나의 경계를 벗어나게 해 타인과 연결되고 나아가 자연과 연결성을 느끼게 한다. 하나로 연결됨을 자각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요가이고, 세계 요가의 날을 정해서라도 알리고 싶었던 것이라 본다. 곽미자 춘해보건대학교 요가과 교수